Page 67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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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고 무덤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뒤를 따라 미추
왕의 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이 진동하고 소리 내어 우는 듯한 소
리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신은 평생을 환란을 구하고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 혼
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는데 지난 경술
년(혜공왕 6년)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이제 신
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
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이를 막고 김유신의 세 차례 부탁에도 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말을 듣고는 두려워 대신을 보
내 김유신의 능에 사과하고 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
해 세운 취선사鷲仙寺에 공덕보전 30결結을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은 54대 경명왕(흥덕왕) 대에 이르러는 흥무대왕興
武大王으로 추봉되기까지 한다. 그의 능은 원형으로 된 봉분 아래에 호석
을 세우고 외곽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호석은 십이지신상을 하나씩 조각
한 것과 조각을 하지 않은 것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마치 왕의 능에 버
금간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같이 김유신의 전생과 현생의 숱한 업적, 정치적
영향력, 사후의 위엄까지를 망라하여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김유신은
탄생부터 남다르다. 김유신 조에는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595)생으
로 북두칠성의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에 등에 북두칠성 무늬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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