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고경 - 2020년 4월호 Vol.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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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그리고 ‘덴노 제도의 불교’로 재탄생된 메이지 시대의 일본불교(계)는
국가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는 하부기구로 변한 채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
아 각국에 ‘근대’와 ‘문명개화’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1877년 오쿠무라 엔
싱奧村圓心과 히라노 에스이平野惠粹가 부산에 설립한 동본원사 부산별원
(지금의 중구 신창동 대각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종교(불교)를 컨트롤하는 경험과 요령을 자세히
습득한 ‘제국주의’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후, 일본과 조선
의 일체화를 위해 ‘조선불교’를 일본식의 ‘대처帶妻가 주류인 불교’로 바꾸
고자 정책적으로 노력·추진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 간 대다수 학
승들이 귀국 전후로 결혼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근대’로 치장治粧하고, 국
내에 있던 친일승親日僧들이 점차 혼인하기 시작하자 조선에서 비구승의
숫자는 차츰 줄어들었다. 일제의 통치 연수年數가 쌓임에 따라 출가자의
결혼과 대처는 어느 새 ‘파계破戒’가 아닌 ‘일상’이자 ‘자랑 거리’가 되어 버
렸다.
아무튼, ‘식민지 근대’의 한반도 불교를 일본식의 ‘대처승 중심 불교’로
만든 근대기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
러나 현실은 부족하다 못해 공백에 가까운 결핍 상태다. 근대 일본의 불
교·불교정책에 대한 이해와 천착이 빠진 일제하 조선불교 연구는 ‘절름
발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 최근 위덕대 이태승 교수가 출간한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파주:올리브그린, 2020, 사진 1)은 근대기 ‘일
본불교의 정책’, ‘일본불교의 변화 과정’, ‘일본의 불교학이 강해지게 된
배경’ 등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책과 함께 『근대 일본
과 불교』(서울:그린비, 2009, 사진 2), 『식민지근대라는 경험-식민지 조선과
일본 근대불교』(일어판, 교토:法藏館, 2018, 사진 3), 『근대 일본의 종교담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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