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0년 4월호 Vol.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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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자들이 도쿄의 정해진 곳에 모여 법회도 보고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

            졌다. 그러다 제종공동으로 ‘제종총횡諸宗總黌’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1870
            년 3월 개교했다. 이후 종단연합으로 혹은 종단별로 학교를 건립했다. 도

            쿄의 이케가미池上 학료學寮, 에치젠의 가학료假學寮 등이 대표적인 예다.
            나아가 조동종은 1882년 조동종 대학림[1905년 조동종 대학, 1925년 고마자와

            대학駒澤大學으로 개칭], 일련종은 릿쿄 대학立正大學, 진종 대곡파는 오타니
            대학大谷大學, 진종 본원사파는 류코쿠 대학龍谷大學, 임제종은 하나조나

            대학花園大學, 진언종은 고야산 대학高野山大學, 천태·밀교는 다이쇼 대학
            大正大學 등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설립했다.

              동시에 동본원사는 산스크리트어 학습을 위해 1876년 난조분유南條文
            雄와 가사하라 겐쥬笠原硏壽를 영국에 보냈다. 서본원사는 1875년 이마타

            테 도스이今立吐醉를 미국에, 1881년 가타바타케 도류北畠道龍를 구미에,
            후지시마 료온藤島了穩을 1882년 프랑스로 보내 공부시켰다. 다른 종단들

            도 영향을 받아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역사적으로 대처적對妻的 분위기가
            강했던 정토종 계열은 신도와 사찰을 연결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와 장의

            불교葬儀佛敎 등으로 다져진 경제적 능력을 일찍부터 학교 건립과 유학생
            파견에 십분 활용했다.

              게다가 메이지 정부는 1872년 ‘출세간의 출가자’들도 황국신민으로 만
            들고자 출가자가 고기 먹는 것[식육食肉], 결혼하는 것[대처帶妻], 머리 기

            르는 것[축발蓄髮] 등을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출세간의 존재를 세간의
            개체로 다시금 확실하게 환속還俗’시킨 것이다. 이후 대처帶妻가 일본 불

            교계의 주류가 되고 중심이 되었다. 비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
            만 비구는 적어도 비주류로 전락되고 말았다. 대처화된 교단의 수뇌부들

            이 자기 자제들을 유학 보내고 교육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은 자명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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