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8 - 고경 - 2020년 8월호 Vol.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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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세력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회유의 대상으
로 인식되었다. 그런 까닭에 원은 1273년 삼별초
군의 대몽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한
다는 명분으로, 수선사 사유지를 몰수했고 경제
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
기 위해 원감 국사 충지(園鑑國師沖止, 1226-1292, 사
진 1)가 원 황제에게 「복토전표復土田表」를 올린다.
사진 1. 원감 국사 충지.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준 황제는 원 세조
였다. 이에 대한 답례로 원감 국사는 원 황제에게 감사의 글을 올리는 한
편 축성祝聖을 맹세하였다.
원감 국사가 원 황제를 만나기 위해 원을 방문한 것은 충렬왕 1년(1275)
이다. 이때 원 황제는 원감국사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그에게 금란가사金襴
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 불자拂子 한 쌍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베풀어진 원 황제의 대접이 어떤지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이
런 상황들은 고려 왕실의 정치적인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왕정王政 복고를 이루기 위해 원과의 강화를 긴
밀하게 맺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가
출중한 수행력을 갖춘 국사國師였던 점도 원 황실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
던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불교계는 원의 간섭기에 현실과 타협하
여 불교를 안정적으로 보존하려는 입장을 가졌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원감국사는 고려 후기 불교계를 대표했던 수행
승으로, 송광사(사진 2) 16국사 중의 한 분이다. 생애를 살펴보면 전라도 장
흥 출신으로 속성은 위魏씨이고 속명은 원개元凱다. 1242년 사원시司院試를
거쳤으며, 『고려사』에는 고종 갑진(甲辰, 1244)년 예부시禮部試에 장원급제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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