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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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석조. 동파의 다관인데, 옹방강이 이 다관을 그려 자신의 서재에 걸어두었다. 그와 교유했던 조선 문인이 이를
보고 묘사해 온 것이다.
반적으로 불교계가 보인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성리학이 주도적인 사상으
로 정착되자 불교계는 불교를 비판하는 성리학에 대해 방어적이면서도 타
협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불교계의 이런 흐름은 곧바로 차 문화를 지탱하
는 기반이 약화되는 커다란 변화와 연결된다. 고려시대 차 문화를 주도했
던 왕실의 몰락과 불교계의 사회, 경제, 정치적 역량의 약화는 조선시대 차
문화를 발전시킬 토양의 위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 차 문화가 난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경제
적 후원과 차의 애호, 여기다 풍요로운 사원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준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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