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0년 9월호 V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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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차를 생산해 이를 수행과 결합했던 출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서 차 문화의 격을 높일 수 있었다. 승려들과 교유했던 관료 문인들이 차
문화의 고아한 품격을 풍요롭게 만든 인문적 소양을 단단하게 뒷받침해 준
것 역시 고려시대 차 문화가 발전된 연유의 하나이다. 사회·정치적 안정으
로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시기에 차 문화는 발달했고 큰 꽃을 피웠는데,
이는 한·중·일 삼국의 차 문화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
므로 조선의 건국으로 차 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구성 여건이 약화 되
고, 특히 차 문화가 불교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한 지배층의 인식이 조선
시대 차 문화를 위축시킨 큰 장애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왕실의 상징적인 조치는 태종 때에 시행되었다. 바로 조선 왕실의 의례
에서 올리던 요전(澆奠, 무덤 앞에 차려 놓은 제물상祭物床)에 다탕茶湯을 술과
단술로 바꾼 조치로, 태종 16년(1416)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된다.
당시의 정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왕先王 ·선후先后의 기신재제忌晨齋祭에 술과 감주甘酒를 쓰라
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주서周書』에 제사에만 이
술을 쓰라고 하였으니, 예전부터 제사에 술을 쓰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본조本朝의 선왕·선후의 기신재에 모두 요전澆奠이
있는데, 홀로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 ·신의 왕후神懿王后 요
전에만 술을 쓰고, 그 나머지 요전에는 모두 다탕茶湯을 쓰니,
대단히 예禮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태조 요전의
예例에 의하여 기신마다 모두 술과 감주甘酒를 쓰소서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命先王先后忌晨齋祭, 用酒醴, 禮曹啓《周書》曰:
‘祀玆酒.’ 自古祭祀無不用酒. 本朝先王·先后忌晨齋, 皆有澆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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