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6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P. 106
을 통한 이런 판단은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유
용하다. 그래서 촉각 경험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 더구나 태어나서부터 머
리를 벽에 찧으면서 한 생생한 경험이어서 이를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벽이 꽉 차 있다는 판단은 세계의 실제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전기를 띄지 않는 중성자나 중성미자는 우리 몸이나 벽을 비롯한 모든 물
질을 거의 자유롭게 통과한다. 이는 우리 몸이나 벽이 다른 물질이 통과할
수 없게 무언가로 꽉 차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몸이나 벽이 어
떤 물질이 통과할 수 없다는 그 스스로의 변치 않는 고정된 특성, 즉 자
성自性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나 벽은 무언가로 꽉 차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물질을 통과
하지 못하게 하는 자성을 지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몸도 무자성無自性이고
벽을 비롯한 우리 주변의 모든 물체도 무자성이다. 다만, 전자로 둘러싸인
물체가 전자로 둘러싸인 다른 물체를 만나면, 그들 사이에 전기적 반발력
이 생길 뿐이다. 서로에 대한 전기적 반발력이라는 인연이 성립되면서, 우
리 몸이 벽을 통과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다만 그뿐, 그
이상의 무엇이 없다.
우리가 그리는 세계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몸이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경험해 왔다. 이 경험
을 통해 우리는 벽이나 우리 몸이 다른 물체를 통과하지 못하는 자성을 지
닌다는 관념을 갖게 된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벽이란 통과할 수 없
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고, 이 관념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우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인식하고 이에 대해 관념을 만
들어 내고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대상이 나의 밖에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