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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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설(차) 대신 생강이나 귤(차)을 쓴다. 관가에서는 찹쌀을 볶아
                물에 타는 것 또한 차라고 한다. 근래 풍속에서는 혹 백두산의

                삼나무 순을 (차로) 쓰기도 한다[或代以雀舌·薑橘, 官府熬糯米沈水亦
                謂之茶, 近俗或用白頭山杉芽].”



              인용문은 18세기 말, 대용차代用茶의 일종인 생강차나 귤차를 포함해
            차[茶]를 정의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설차를 대신하여 생강차나 귤차

            등을 차라며 마셨고, 간혹 찹쌀을 볶아 물에 타 마시는 것도 차라고 불렀

            다는 점이 확인되는데, 이는 종래 차라는 의미가 범용적汎用的으로 사용되
            어, 대용차를 차로 불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차 문화가
            소멸되는 상황은 이덕리(李德履, 1728-?)의 『기다記茶』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차가 나는 고장은 호남과 영남에 두루 퍼져 있
                다. 『여지승람』, 『고사촬요』 등 책에 실려 있는 것은 다만 백 분
                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설이 차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차

                와 작설이 본래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차를 따서 차

                를 마시는 자가 없다. 일부 호사가는 차라리 북경 시장에서 사
                올지라도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취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我

                東産茶之邑,  遍於湖嶺,  載『輿地勝覽』·『攷事撮要』等書者,  特其百十之一也.
                東俗雖用雀舌入茶, 擧不知茶與雀舌本是一物, 故曾未有採茶飮茶者. 或好事

                者, 寧買來燕市, 而不知近取諸國中.]”


              윗글은 18세기까지도 차가 광범위하게 자생했지만, 차를 알았던 사람이

            드물었던 당시 차 문화의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에도 연경에 가 차를 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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