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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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人近作茶饕, 兼充藥餌. 書中妙解, 全通陸羽之三篇, 病裏雄蠶, 遂竭盧
                仝之七椀. 雖侵精瘠氣, 不忘綦毋㷡之言而消壅破瘢, 終有李贊皇之癖].”



              윗글을 통해 다산은 이미 『다경』이나 노동의 「칠완차」를 숙독하며 차의

            이치를 터득했고, 기무경이 말란 ‘차를 마시면 정기가 쇠해진다’는 음다의
            폐단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겐 이미 ‘다벽茶癖’이 생겼다
            는 것이다. 후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인 1818년경 그

            가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茶信契」도 아암 스님을 만난 후 차를 향유하는 즐

            거움을 좋아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초의 선사가 다산을 만난 인연 역시 아암 스님 때문이다. 초의가 대흥
            사(사진 3)로 거처를 옮긴 건 1809년이다. 당시 초의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

            되었고, 대흥사 스님들과 내왕이 잦았음도 알았을 것이다. 대흥사로 옮긴

            초의는 바로 다산초당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고, 이는 초의가 경
            화사족들과의 교유를 넓힐 인연으로 작용하게 된다. 초의는 다산초당에서
            만났던 다산의 아들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를 만

            났고, 이들을 통해 경향의 권세가와 선비를 만났다. 1830년 완호의 탑명塔

            銘을 받기 위해 상경한 초의는 1831년 홍현주의 별장[別墅]인 청량산방에서
            열린 시회詩會에 참석해 자신의 문재文才를 드러낸다. 이로 인해 ‘초의’라는
            이름이 경향京鄕에 거명擧名되기 시작했다. 초의는 1837년 홍현주의 부탁

            으로 「동다송」을 저술하여 조선 차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렸는데, 초의를

            전다박사煎茶博士로 칭송했던 경화京華 사족士族들이 초의의 식견을 인정했
            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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