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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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이 있었던 듯한데, 이는 사람
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과시였을 뿐
실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차 문화가 거의 사라질 위
기에 있었던 흐름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차와 타물他物을 섞어 약
용으로 사용한 사례가 등장한 시
기도 이 무렵이다. 이운해(李運海,
1710-)의 『부풍향차보扶豊鄕茶譜』에
사진 2. 초의가 쓰던 흑색 다관.
서술된 7종의 상차常茶가 그런 사례이다.
차가 나는 산지에서 병을 치료하는 일상 약품
으로 개발한 것인데, 풍風·한寒·서暑·열熱·감感·수嗽·체滯를
치료하는 향약鄕藥으로 음용飮用했다. 차를 약으로 인식했고, 차와 한약재
를 섞어 이질, 감기, 체한 것 등을 치료하는 단방약單方藥으로 사용하였던
사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다飮茶의 가치를 이어간 계층은 승려들이었다. 조선
후기 초의(草衣, 1786-1866, 사진 1·2) 선사와 교유했던 경화 사족들은 찻잎
으로 만들 차를 마시는 이로움을 재인식했으며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과
애호가 조선 후기 차 문화가 중흥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의 하나였다. 이런
시대 흐름을 이끈 그룹은 대흥사의 스님들이었는데, 특히 아암(兒庵, 1782-
1811) 스님과 그의 제자들, 초의 스님과 그의 제자들이 차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원천적 토대인 차를 만드는데 힘쓴 출가자들이었다. 초의는 선
차禪茶를 연구·발전시켜 경화京華 사족士族들이 차에 관심을 갖게끔 촉발
시켰던 인물로, 그가 만든 ‘초의차’는 우리 차의 우수성을 부각시켰던 차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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