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0년 11월호 Vol.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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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가 우리 차의 우수성을 피력한 내용은 「동다송東茶頌」에서 확인된다.
조선에서 나는 차는 원래 중국과 같아서 東國所産元相同
(차의) 색, 향기, 맛과 기운이 한 가지라. 色香氣味論一功.
육안 차의 맛과 몽산 차 약성을 갖췄으니 陸安之味蒙山藥
옛사람의 높은 판단, 맛과 약성을 다 갖췄다고 하리라. 古人高判兼兩宗.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초의가 우리 차의 수준에 대한 확신은 굳건
했다. 차는 맛과 약성이 주된 가치이다. 이는 제다를 통해 완성된다. 초의
차가 경향의 인사들에게 칭송받았던 연유는 바로 맛과 약성을 두루 갖춘
차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초의차가
다삼매茶三昧를 이룬 차라고 극찬했으며, 신위(申緯, 1769-1847)와 박영보(朴
永輔, 1808-1872) 등은 5백 년 동안 혼미했던 차 문화를 드러낸 인물로 초의
를 거론할 정도였다. 초의가 차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은 「남다병서南茶幷
序」와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에서도 확인된다. 초의는 『다신전茶神傳』의 후
발後跋에서 조주(趙州, 778-897) 선사의 끽다풍喫茶風이 사라진 당시의 현실
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시자방侍者房에 있던 수홍이 다도를 알고자 했기에
차 문화를 일으키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초의의 본의本意는 직접
만든 좋은 차를 통해 탈속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려했
다는 점에 있었다. 수행과 결합된 차 문화를 회복해 수행자들이 더욱더 수
행에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싶었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대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차를 애호하게 된 것
은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진도 감목관 이태승의 소개로 만덕사의 아암 스
님을 만나면서부터다. 다산과 아암 스님은 1805년경 만나 깊이 교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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