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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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긴 상량문’이 발견된 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한 연구자가 있는데 바로 부산대의 서치상 선생님이다. 서
             치상 선생님의 일련의 연구를 보면 불교건축 상량문의 독특함을 규명한

             것은 물론,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상량문을 적는 방식의 변화와 유불 간

             의 상관성을 밝혀낸 것이다.
               서치상 선생님의 여러 연구 성과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
             는 부분은 특히 해인사와 범어사의 사례를 통해 불교건축의 상량문에 어

             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밝혀낸 부분이다. 임진왜란 직후 해인사 판전을 수

             리하면서 적은 3건의 상량문을 통해 유교식 ‘긴 상량문’이 어떻게 불교에
             수용되었는지를 확인하였고, 1658년부터 1699년까지 연이어 작성된 범어
             사의 상량문 4건을 통해 이를 재차 확인하였으며, 더불어 목재에 쓰던 상

             량문을 종이에 써서 종도리 홈에 넣기 시작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힌트

             를 제공하였다.


                기계적 이식에서 능동적 수용으로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상량문이 남아 있는 고려 중기 이후의 사례를 중
             심으로 긴 호흡에서 본다면 불교는 결과적으로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했
             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긴 상량문’을 작성하더라도 말미에 불사에 참여한

             모든 인물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하되, 불교의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공덕신앙
             과 공동체의식을 유지하면서 유교식 상량문을 수용했다고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사진 6. 보문사 극락전 관계자 명단).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교가 ‘긴 상량문’을 수용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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