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고경 - 2021년 4월호 Vol.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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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큰 틀에서 유교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갔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시대
적 분위기상 왜란과 호란을 거푸 거치면서 『주자가례』를 강조하는 원리주
의적인 성리학자들이 득세하며 사회는 급격히 보수화되는데, 이러한 격랑
속에서 불교는 더욱 유연하게 변화하는 사회분위기에 적응하려고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지도적 위치의 스님일수록 불유佛儒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교적 글쓰기에 적극적이었는데, 상량문의 수용도 바로 그런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왕실은 물론 유력가문에서 사찰을 후
원하며 상량문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유교식 상량문
에 영향을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유교와는 달리 조선후기가 되면서 종이에 먹으로 쓴
상량문을 종도리 속에 넣는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최근 수리하면서 확인된 상량문 및 같이 발견된 유물을 통해 당시 사찰에
서 상량식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는지 추정해 볼 수 있는 사례들
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불교에서는 상량식을 이전과는 다
르게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사진 7. 보문사 극락전 상량유물 일괄).
19세기 들어서는 상량문을 넣는 종도리 홈에 상량문만을 넣는 것이 아
니라 경전, 오색실, 오곡, 약재, 구슬, 동전, 다라니, 악세사리 등을 같이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물목物目이 들어갔다는 것은 같은 시
기 정형화된 불상의 복장의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불상에 복장을
한다는 것은 조각품에 종교적 생명력을 넣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량문과 함께 종도리 홈에서 이러한 물목이 확인된다는 것은 어떠한 의
미일까?
시기가 내려올수록 상량문과 함께 복장유물과 비슷한 구성을 보이는 유
물이 발견되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지는데, 특히 불자들이 평소 몸에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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