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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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역사가 문을 지키는 전통은
             분황사탑에서도  표현되어  있으며,

             12세기  개성  안화사의  신호문神護
             門도 천왕문이라기보다는 금강 역사

             가 있는 금강문이었을 것이다. 그리
             고 현존하는 사례로는 15세기 후반
             의 도갑사의 해탈문이며, 임진왜란
                                               사진 8. 『범음산보집』의 12단 배설지도에서 정문
             직후 중창되는 대형 사찰에서는 대
                                               의 위치.
             부분 금강문이 들어서 있다.
               당시 금강문을 세운 뜻은 물리치는 문만을 세운 것이 아니라 보살을 동
             자의 모습으로 세워 환영하거나 유도하는 의미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지

             만 그 정확한 의미를 현재 알 수는 없다.



                천왕문
               원래 부처님의 사방을 옹위하는 존재였지만 사찰의 산문에 들어섰다는

             것은 큰 변화이다. 물론 문 안에서 동서남북의 방위와 지물을 유지하고 있

             더라도 부처님의 곁을 지키다가 길목을 지키는 변화는 그만한 계기가 있지
             않으면 힘들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천왕문이 보편화된 시기는 외세의 침범에 맞선 사찰의 피

             해를 복구하던 17세기 전반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당시 왜군은 승군으로

             활약한 불교를 철저하게 보복하였는데, 이후 전공을 인정받은 불교계는 전
             국적으로 사찰을 재건하면서 호법의 의미에서 천왕문이 유행하게 되었다
             는 것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지만 15세기 천왕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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