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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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언제 건물인가
이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당시 부석사를 둘러싼 불교계의 상황을 고려하
면서 파악할 문제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려 초’라 볼 수 있다. 10세
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은 선종만이 국사를 배출하던 이전과는 달리 화
엄종과 법상종도 번갈아 국사를 배출하던 시기로 종파간의 각축이 있었
다. 그 와중에 법인 국사 이래 오랜 침묵을 깨고 화엄종에서 다시 국사를
배출했던 시기가 바로 11세기 초이다.
원융이 국사가 되면서 부석사가 하산소로 결정되고, 전례에 따라 왕의
후원으로 부석사가 중창되는 과정에서 무량수전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건물의 세부수법이 가리키는 시기와 겹쳐지는데,
비록 원응(圓應, 1307-1382)의 오기라지만 「개연기」에 등장하는 원융(圓融,
964-1053)이 무량수전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에 등장한 이유를 되새겨 볼 필
요가 있다.
최고最古가 최고最高인가
최고最古를 선호하는 것은 문화재를 골동품의 관점에서 보는 습관 때문
이다. 수덕사는 1308년이라는 양식사적 기준을 제시하는 작품이라 그 가
치는 엄청나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 작지만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명
품건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동시대 중국의 건축과 규모는 물론 수법
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 작품으로 국제적 시각에서도 고려의 건축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건축이다. 이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건축일까? 그건 독자
들의 기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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