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고경 - 2021년 10월호 Vol.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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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명확하게 ‘불佛’을 ‘자성’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러한 과정은 중국 반야학을 통관해야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이 숨어
있다. 본래 ‘반야’란 우리가 인식하는 제법에 스스로의 존재성이 없음을 명
확하게 앎이지만, 점차 반야의 지혜를 통하여 ‘자성’을 찾으라는 논리로 전환
된다. 이는 마치 ‘무아無我’를 설하면서 참다운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논리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중국선에서 이러한 과정은 바로 하택신회의 어
5)
록에서 상세히 엿볼 수 있다. 신회는 ‘자성’을 지극히 강조하였으며, 나아가
6)
그러한 ‘자불성自佛性’에 대하여 ‘견見’할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경』에서는 ‘불’을 ‘자성’으로 규정하고서 또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자심自心’이 중생임을 알고 ‘자심’이 ‘불성佛性’임을 보아라. 7)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자심’이 중생임을 알아서 ‘자심’으로부터 불
성을 보도록 가르친다. 8)
5) 『南陽和尙問答難徵義』(石井本), 楊曾文, 『神會和尙禪話語錄』(中華書局, 1996.), p.69. “지금 비춘다[照]는 것
은 거울이 맑기 때문에 ‘자성自性’의 비춤이 있는 것이다. 만약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여 자연自然히 대
지혜의 광명이 있으면, 세계를 남김없이 비출 것이다.[今言照者, 以鏡明故, 有自性照. 若以衆生心淨, 自然有大智慧光,
照無餘世界.]”, 앞의 책, p.99. “다만 본래의 ‘자성自性’이 공정함을 깨닫는다면, 다시 관觀이 일어나지 않
으니 바로 종통宗通이다.[但了本自性空寂, 更不復起觀, 卽是宗通.]”, 앞의 책, p.81. “무념無念을 보는 것은 ‘자성自
性’을 깨닫는 것이다.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은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이다.[見無念者, 謂了自性. 了自性者, 謂無所
得.以其無所得, 卽如來禪.]”
6) 『南陽和上頓敎解脫禪門直了性壇語』, 앞의 책, p.7. “지식들아, 자신 가운데 불성이 있는데[自身中有佛性],
요연하게 볼 수 없으니 어떤 연유인가? 비유컨대 이곳에 각각의 집을 생각하여 주택, 의복, 침구 및 일
체의 물건들이 갖추어 있음을 알고 더욱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지知’라고 하고, ‘견見’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약 행하여 집에 이르러 위에서 말한 물건들을 본다면, 즉 ‘견見’이라고 하지 ‘지知’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 깨달으려는 자들이 다른 말에 의지하여 자신[身] 가운데 불성이 있는 것을 안다면 요
연了然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知識, 自身中有佛性, 未能了了見. 何以故? 喩如此處, 各各思量家中住宅,衣服,臥具及一切等物,
具知有, 更不生疑. 此名爲知, 不名爲見. 若行到宅中, 見如上所說之物, 卽名爲見, 不名爲知. 今所覺者, 具依他說, 知身中有佛性, 未能了
了見.]”, p.10, “무엇이 심원深遠한가? ‘견성하지 못함[不見性]’으로 심원하다고 말한다. 만약 ‘견성’하여 깨
달았다면 바로 심원함이 없을 것이다. 각각 지극한 마음으로 지식으로 하여금 돈오해탈頓悟解脫하게 하
라.[云何深遠? 以不見性, 故言深遠. 若了見性, 卽無深遠. 各各至心, 令知識得頓悟解脫.]”
7) 敦煌本, 『壇經』(大正藏48, 341c), “識自心衆生, 見自心佛性.”
8) 宗寶本, 『壇經』(大正藏48, 361c), “吾今敎汝, 識自心衆生, 見自心佛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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