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4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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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세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정토진종의 포교활동을 선택했다. 1876
          년에 교도직敎導職 안에서 교정敎正이 되고, 1893년 해외선교회 회장에 취
          임했다. 1905년에는 오우개교총감奧羽開敎總監으로 은퇴할 때까지 정토진

          종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나아가 일본만이 불교를 포교할 수 있다고 주장

          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불교가 황폐해진 인도에서의 경험이 근간이
          되었다.


              “중국, 조선의 불교는 소문과 냄새만 있을 뿐, 논하기에는 부족하

              다. 남부불교는 소승으로 대승에 비해 조잡하다. (생략) 일본불교는
              금구金甌가 빠지는 것이 없고, 불도와 교리는 대승, 소승, 현밀 그
              어느 것과도 비견될 만한 것이 없다. 오래된 수천 권의 경전을 갖

              춘 불가사의한 호연好緣이라 할 수 있다.”      - 『三國佛敎略史』 중에서



           모쿠라이는 주변 국가들의 불교와 비교해 일본불교의 우위성을 강조하
          고, 일본불교를 보존·포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모쿠라이의 주장

          이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은 데에는 그가 인도불교의 현황을 보고

          왔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모쿠라이 시각은 이후, 일본불교의 우위성에
          순수성을 더한 불교의 정통성은 일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시각으로 발
          전하게 된다.

           유럽 포교에 대해서는 『대승교서점大乘敎西漸의 기운機運』(1892)에서, “유

          럽에는 스리랑카의 실론섬나 타이의 소승불교만 전해졌고, 대승불교는 일
          본만이 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기술한다. 흥미로운 점은 모쿠라이가 유
          럽에 불교를 포교해야 한다고 자주 언급했지만, 불교가 쇠퇴한 인도나 실

          론섬, 중국으로 불교를 역유입시킬 필요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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