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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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산되었다. 이후, 서본원사의 오타니 고손大谷光尊(1850~1903)은 자체
적으로 해외 종교상황 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시마지 모쿠라이를
비롯한 5명에게 의뢰했다.
1872년 3월 초, 일행은 요코하마항을 출발해 약 한 달 뒤인 4월 20일,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을 통해 유럽에 발을 디뎠다. 일정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를 시찰한 후 귀국길에 아시아 불교 유적
을 유람하는 것으로 원래 목적이 아시아 불교 유적지 시찰은 아니었다. 이
들의 여정은 모쿠라이가 기록한 『항서일책航西日策』, 『양외만필洋外漫筆』에
1년 4개월에 걸친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여정 중, 모쿠라이의 인도 시찰에 대한 감상은 그가 오오즈 테츠
넨大洲鉄然 등의 동료들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잘 드러난다. 편지의 주요 내
용은 인도 유람에 대한 불안감과 더운 날씨를 호소했고, 더불어 불교도로
서 인도 땅을 처음 밟는 것에 대한 중요성 등을 역설했다. 인도에서 모쿠
라이의 가장 큰 목적은 ‘인도 내지에 들어가면 석가모니 유적을 참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는 인도에 도착하면 바로 앞에 석가모니의 유
적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 같다. 이후의 인도 여정에서는 불교 유적에
대한 모쿠라이의 흥미는 급속도로 감소한다. 뭄바이에서는 인도인의 풍
속, 경관, 힌두교 사원, 이슬람교 사원 등은 상세하게 기술하지만, 불교 유
적이나 불교 사원은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항서일책』 6월 6일조에는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아쇼카왕의 돌기둥
을 본 감상을 “아육왕이 세운 돌기둥이 있다. 위에 사자를 조성하고 높이
45장丈이다.” 정도로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사르
나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아쇼카왕의 돌기둥에 대한 감상 역시 기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붓다가 지나간 파트나Patna는 열차 안에서 “도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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