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고경 - 2022년 2월호 Vo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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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 친왕이 입당 후 인도로 가려고 했던 사실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모쿠
             라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인도 땅을 처음 밟은 일본인 승려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서구 종교에 맞선 교세 확장과 해외 포교 역설


               해외 종교 시찰을 통해 모쿠라이는 ‘religion’, 종교라는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고, 이 개념을 이용해 불교를 변증해 나갔다. 일본에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교뿐이고, 불교만이 서양의 기독교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양의 문명에 압도당해
             서양의 문명은 기독교의 성과이며,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

             했다.

               모쿠라이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일본이 문명화를 지향한다면 기독교
                                        를 수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모쿠
                                        라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으로 그

                                        는 다시 “유럽의 문명은 종교가 아닌 학술

                                        에 근거한다.”라고 번복하고 회피했다. 당
                                        시 일본불교는 메이지 유신 후, 신정부에
                                        의해 종래의 봉건적 특권을 빼앗기고 존폐

                                        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모쿠라이는 불교가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판단해 활동의 자유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진 3. 모쿠라이가 동인으로 활동한
             잡지 『일본인』. 사진 위키피디아.          모쿠라이는 기독교에 대항할 수 있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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