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2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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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했다. 1949년 1월 민
의원 보궐선거에서 부산시
갑구에 무소속으로 당선되
었지만, 다음 해 6월 선거
에서 낙선했다. 한국전쟁
이 발발한 후 북한으로 가
사진 5.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창립대회. 서 1952년 1월 30일에 사
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영호의 시대 담론과 학술 연구
허영호는 『불교』 잡지(1929~1933)에 「무아無我의 애愛를 더듬어서」, 「십이
상연법十二相緣法에 대해서」 「요별삼십송了別三十頌의 석釋」, 「범파양어梵巴兩
語의 발음법에서 본 조선어발음법에 관한 일고찰」, 「금강반야경에 대해서」,
「절寺의 어원에 대하야」, 「조선불교 교육제도의 결함과 개선」 등의 글을 기
고했다. 여기서 불교 개념과 교리, 경전과 언어, 역사와 제도 등에 대한 그
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1932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중앙불전에서 가르치게 된 허영호는 당시
사회주의 계열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던 반종교 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글
을 썼다. 「반종反宗운동의 근거와 그 오류」(『불교』 100(1932))에서 그는 종교는 생
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비록 종교의 제반 사항을 문제 삼을 수 있겠지
만 반종교적 입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종교의 발생은 무지와 공
포뿐 아니라 생산과 경제, 인간의 행복 추구 관념 등 여러 다양한 원인과 배
경에서 나온 것이므로 일방적 폐기는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또 반종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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