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P. 139
사진 1.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허영호.
사진 2. 3.1운동 당시 동래 범어사 전경. 사진 부산역사문화대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중등학교인 범어사 지방학림에 입학했
는데 법호는 경호鏡湖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법린의 주도 아
래 범어사 승려들과 함께 동래에서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 번 죽
더라도 자유를 얻겠다.”는 격문을 작성해 만세 시위를 주동했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부터 2년간 일본 도쿄의 도
요東洋대학 문화학과에서 공부했는데, 재적 사찰인 범어사의 지원이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에 귀국한 뒤에는 강연과 함께 지역에서 활발히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1925년 11월 동래 청년연맹을 창립한 후 대표로 활동했고, 1926년 8월 발
행인 겸 편집인으로 월간 문예잡지 『평범』을 동래에서 발간했다. 이 잡지는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했지만 재정난으로 3호까지만 냈다. 이 시기에 그
는 잡지 『신민』에 소설 「방황」(1925), 「그와 그들」(1927) 등과 논설인 「자유인
과 노예」(1925), 「농민운동」(1926), 「조선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1926) 등을
실었다. 1928년 4월에는 신간회 동래지회 전형위원과 본부 대표위원·정
치문화부 간사를 맡으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그러면서 언론 출판 결사의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