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1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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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당면한 현실을 고
민하고 문제점과 해결 방안
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체제가 강화되
면서 그는 침략전쟁을 옹호
하는 등 이전과는 달리 친일
로 전향했다. 1937년 2월 31
사진 4. 일본 다이쇼대학. 허영호는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본산 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설 기초위원에 선임되었고, 1938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중앙교무원 평
의원과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도 활동했다. 1941년부터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 사서로 활동하면서
각종 기고문과 시국 순회강연을 통해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 예를 들어
1941년 8월 종교, 사상, 정신문화 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조국 일본을 수호
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애국을 위한 모임’이라는 시국 간담회를 열었고,
1942년 9월 조선불교협회가 주최한 일본과 조선 승려 합동 시국 강연회 때
는 ‘대동아전쟁과 일본의 사명’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1943년에는 김
태흡 등과 불교문화보급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그 창립 취지는 황
도불교를 선양하고 흥법보국을 내세운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9월 혜화전문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교장
에 취임했고, 건국준비위원회 개최 모임에 참가하는 등 대외 활동을 재개
했다. 1946년 1월에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에 임
명되었다. 6월에는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승격되자 1948년 11월까지
초대 학장을 지냈다. 이 시기에 교단과 불교혁신총연맹의 갈등을 중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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