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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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37)), 「사교邪敎와 불교도」(『신불교』 4(1937)), 「십이문론」(『신불교』
5-9(1937)),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미타경」(『신불교』 7(1937)), 「천수천안관
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신불교』 8(1937)), 「조선불교
의 입교론立敎論」(『신불교』 9(1937)), 「조선불교의 본존론」(『신불교』 10(1938)),
「조선불교의 불성론」(『신불교』 11(1938)), 「대승기신론」(『신불교』 11-13(1938)),
「보시태자경」(『신불교』 11-12(1938)), 「천태사교의」(『신불교』 14-17·19(1938)),
「원효불교의 재음미」(『신불교』 29-35(1941·1942)), 「연구-대소품반야경의 성
립론」(『신불교』 40·44·46·50·56(1942-1944)), 「연구-불전에 나타난 성수星
宿」(『신불교』 62(1944)) 등이다.
이 글들의 주제를 보면, 경론 역주와 한국
불교의 특성, 원효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허영호가 일본 유학 당시 문헌학, 역사학,
언어학에 기초한 근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
를 익히고, 다이쇼대학 불교학과 졸업논문
으로 산스크리트어 판본과 한역본에 입각
한 「반야부경의 성립차제에 대하여」를 제출
한 사실에서 그의 학문적 이정은 이미 예고
되어 있었다. 그는 『불교성전』, 『불타의 의
사진 6. 『 불교』지 표지. 허영호는 의』와 같은 저작을 통해 불교학의 확산을 도
1937년 『불교』가 속간되
면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모했고,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면서 통불교
맡았다.
로서 한국불교의 특징과 원효를 강조했다.
이처럼 ‘친일과 납북(월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불교학의 기
반을 구축하는 데 그가 많은 기여를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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