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고경 - 2022년 7월호 Vol.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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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무교육, 만주 동포 생존권 문
                                        제 등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 1928
                                        년 5월에는 조선청년총동맹 경남도연

                                        맹에서 대회 집행부 부의장으로 선출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사회단체에
                                        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사회운동을
       사진 3.  허영호가 글을 기고했던 잡지 『신민』의 표지.
           사진 국제에스페란토협회.
                                        주도했다.
           하지만 총독부 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면서 신간회 활동이 위축되

          었고 지역 운동도 침체기를 맞자 1929년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는 도쿄에 있는 다이쇼 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에 입학해 불교학을 전공했
          는데, 다이쇼대학은 일본 천태종, 진언종, 정토종이 힘을 모아 만든 불교

          연합대학이었다. 다이쇼대학 시절에 산스크리트어, 빨리어도 접했고 근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습득할 수 있었다.  이후 그가 반야부를 비롯한 대
          승경전의 번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쌓아 놓은 언어 능력과 학
          문적 소양이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1930년 5월에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동경 지부에 가입했고, 재일본 조선청년회 서무부 간사, 조선 유학

          생 동창회장을 맡는 등 일본에서도 대외 활동을 이어갔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김법린 등과 함께 귀국한 뒤 1932년 9월부터 1933
          년  5월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학감도  맡았다.  하지만

          1933년 교무원의 주도권 문제로 인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동래로 돌아

          왔고 1934년 7월 김해의 해은사 주지가 되어 1937년까지 소임을 맡았다.
          1937년 『불교』 잡지가 속간되면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게 되어 다시 서
          울로 왔고 해동역경원의 주임 역경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조선불교 교정

          연구회 연구부장, 조선불교 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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