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6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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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발표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40년 부친이 만주에
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
었고,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6월 26일에 4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
세했다. 소원인 ‘조선미술사’ 저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불혹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 30년이 되는 1974년에
그가 발견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인 감포 대왕암에 한국미술사학회에서
우현기념비를 세웠고, 1980년에는 미술사학자에 주어지는 우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고유섭의 미술사와 『조선탑파의 연구』
고유섭은 19세기 유럽 미술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실증주의에 입각
한 문헌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했지만 새로운 학설을 수용하는 데도 주저
하지 않았다. 「고대미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1937)에서는 정신
사와 양식(형식)사를 통일시키고, 그 시대의 문화정신을 이해하여 이를 다
시 통합하는 연구방법론을 적용했다. 이는 유럽의 최신 미술사학 방법론
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당시의 학문풍
토에 맞게 변용시킨 것이다. 또 각 시
대 미술의 전반적 양상을 다루어 한국
의 미술사를 개설하면서 당시 유행하
던 사회경제사학의 유물론적 방법론
을 참고로 한 「우리의 미술과 공예」
(1934)를 내기도 했다.
사진 4. 1941년 불국사 석굴암 답사 때의 고유섭은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
고유섭( 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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