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2 - 고경 - 2023년 3월호 Vol.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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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白華航海錄』을 남겼다. 『항해록』에
따르면 종교상황 시찰 계획은 오타
니 코에이의 외할아버지인 후시
미궁伏見宮과 산죠 사네토미三条
実美의 권유, 에토 신페이江藤新平의
추진력과 핫카의 중개로 이루어졌
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풀어 보자
면 오타니파 내부는 이시카와 슌다
사진 3. 『 진종사료집성』(1983) 11권에 『마츠모토
핫카 항해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비롯한 개혁파들이 홋카이도
개척에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자 이
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종무에서 배제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개혁파를
지원하는 정부 관계자가 종교시찰을 강력하게 권유하면서 오타니파로서
는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해서 오타니 코에이가 출발
할 때 문도들에게 “진종 내부에서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상
당하다.”는 서신을 보내는 등 시찰단에 대한 진종 내부의 평가는 우호적이
지 않았다.
시찰단의 목표는 1차 파견 유학생(시마지 모쿠라이 등)과 동일하다. 유럽의
종교정책을 시찰하고 이를 새로 신설된 대교원大敎院의 정책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2차 시찰단은 핫카와 오타니 코에이의 마찰 등 내부
적 문제로 원활히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시마지 모쿠라이가 정교政敎분
리와 신불분리를 설파해 구석에 몰린 불교를 살리기 위한 성과를 낸 것에
비해 2차 시찰단은 이에 필적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핫카는 귀국 후 진종 본산의 집사보執事補에 임명받았지만 이를 사임하
고 다시 교부성에서 일하면서 환속했다. 1877년 다시 승적을 복구한 후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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