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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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는 긴 비문을 지었는데, 무염국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
          부하는 과정, 귀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을 기록하
          였습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도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骨品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고 합니다.

          특히 빗돌은 보령 남포면에서 나오는 오석烏石을 썼는데, 1천여 년의 풍상
          을 견디며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뛰어난 품질을 입증하고도 남는 듯합니
          다. 그러나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되지 못하고 폐사지가 되

          어 오늘날 절은 온데간데없고 5층 석탑과 3층 석탑 및 석조물만이 그 터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대낭혜화상 무염국사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어서 당나라의 여만선사는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

          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

          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며 크게 칭찬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다시
          그 선풍이 일어나길 두 손 모아 빌었습니다.
           12시에 점심공양을 하고 새만금 방조제의 웅장함을 감상하며 고군산군

          도(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를 둘러보았습니다. 각 섬이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 장관을 보면서 여수와 고흥 사이의 다섯 개 섬을 두 개의 연
          륙교와 세 개의 연도교로 연결한 것도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
          지런히 돌아다녔지만 백련암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오후 7시에 겁외사에

          도착하여 3일간의 긴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봄날이 흘러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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