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고경 - 2023년 5월호 Vol.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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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겠다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4월 12일, 대낭혜화상 무염국사를 만나다
4월 12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가까이 대천해수욕장 백사장을 걷기도 하
고 쉬기도 하다가 의견을 모아 성주사지聖住寺址를 답사하기로 하였습니
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던 성주사는
1960년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에 의해 백제 제29대 법왕法王 때 창건
된 오합사烏合寺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 폐허가 되었다
가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無染(800~888)
국사가 머무르면서 중창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문성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습니다.
무염국사는 821년 당나라로 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
席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이미 당나라에는 화엄학보다 선종이 크게 일어나
고 있었으므로 불광사佛光寺 여만如滿 선사를 찾아가 선법을 배우고, 마곡
산麻谷山 보철寶徹 선사에게서 마조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습니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
라고도 불린 분입니다. 무염스님은 귀국하여 성주사를 성주산문의 본산으
로 삼아 40여 년 동안 교화를 펼쳤습니다.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때는 2천
5백 명 가량의 승려들이 살았고,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십 리
나 흘렀다고 합니다.
무염국사가 89세로 입적하자 진성왕은 최치원崔致遠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彗和尙
白月葆光塔碑(국보 제8호)입니다. 최치원은 화려한 문장 솜씨로 5,120여 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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