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 - 고경 - 2023년 6월호 Vol.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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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9점이나 있습니다. 지증대사탑비는 국보이고, 지증대사적조탑, 삼층석
          탑,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腹藏遺物, 정진대사탑비, 정진대사
          탑, 최근에는 마애미륵여래좌상과 일주문이 보물로 추가 지정되었습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면 봉암사의 정문인 남훈루가 보입니다. 문루 겸 2층

          누각 강당은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종립선원이 있는 사찰답게 장엄하고 풍
          류가 있습니다. 마당 좌우에는 커다란 노주석이 2개 있습니다. 야간에 행사
          할 때 관솔불을 피우는 조명 시설인데, 이것 역시 보기 드문 시설입니다.

           역사의 맨 아래층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가 있고, 맨 위층에는 출

          렁거림이 있습니다. 봉암사에서 한국 현대불교의 문화문법이 탄생했고 뿌
          리가 튼튼해졌습니다.
           1947년 해방 직후 혼란기에 35세의 성철스님(1912~1993)이 주도한 봉암

          사결사는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게 원이었습니다. 참여한 사람은

          우봉, 보문, 자운에서 청담, 향곡, 월산, 종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
          경, 법전, 성수, 혜암, 의현 이렇게 20명으로 늘어나고, 나중에는 50명이
          넘게 참여했습니다.      2)

           ‘석존에게 돌아가라!’는 테제는 불교사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혁신은 동시에 복고입니다. 봉암사결사에는 18개 조항의 엄격한 공주규
          약共住規約이 있었는데, 그에 따라 모든 사람이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습니다.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

          람 땀 흘리는 생활 속에서 면벽참선을 실천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 자발적으로 생활과 밀착한 가운데 수행했기에 현재에도 살아 있는 정
          신입니다. 결사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을 비




          2)  서재영, 「봉암사결사의 정신과 퇴옹 성철의 역할」, 『봉암사결사와 현대 한국불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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