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23년 8월호 Vol.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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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을 교체한 것은 금당에 봉안한 불상이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기 때문에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이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완원의 북비남첩론과 추사의 금석문



           극락보전에 걸린 현판의 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육조풍의 서
          법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렇다. 청淸나라 대학자 완원阮元(1764~1849) 선생

          이 서법론에서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북조北朝 특히

          북위시대의 비석을 북비라고 한다. 완원선생이 이 문제를 제시할 때까지
          사람들은 주로 남조南朝의 왕희지王羲之 이래 진당晉唐 시대의 서첩으로 전
          해 오는 글씨를 서법의 전범으로 삼았는데, 그는 이런 흐름을 첩파帖派라

          고 하고 석비에 남아 있는 북조사람들의 글씨를 공부해야 서법의 진미를

          터득할 수 있다고 하는 유파를 비파碑派라고 구분했다. 그런 결과 비파의
          서법론이 중요해지면서 서법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고대 청동그릇에 새
          겨진 글씨(금문金文)나 석비에 새겨진 글씨(석문石文), 즉 금석문金石文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부각되었다. 여기서 금석학이 본격적으로 학

          문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완원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호까지 ‘완당阮堂’으로 정한 추사선생이 금석
          문을 중요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예의 진정한 법을 탐구해 간 것은 그의

          학문방법론인 실증주의적 방법에도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당시 청조

          학단의 이러한 담론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추사선생이 한반도의 고대시
          대의 비를 찾아 탐구한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북한산신

          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와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黃草嶺新
          羅眞興王巡狩碑’도 찾아내었고,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䥐藏寺阿彌陀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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