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7 - 고경 - 2023년 8월호 Vol.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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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된 후 15년간 학문을 좋아하는 문예군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23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어 다시 안동김씨 세력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먼 왕족인 원범元範이 철종哲宗(재위 1849~1863)으
로 즉위하면서 헌종의 장례를 마무리하는 조천祧遷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신해예송辛亥禮訟’ 사건에서 철종을 옹립한 세력인 좌의정 김흥근金興
根(1796~1870)과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후손이자 김조순金祖淳(1765~
1832)의 아들인 김좌근金左根(1797~1869)이 중심이 된 안동김씨 세력과 헌종
세력 간에 왕위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게 된다. 현실의 권력투
쟁에서 헌종 세력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 논쟁에서 결국 헌종 세력의 중
심에 설 수밖에 없었던 추사선생은 그간 그를 보호해 주던 영의정 권돈인權
敦仁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된다. 그
때가 1851년이다.
이제는 신산한 삶을 뒤로 묻고 새로이 바른 길을 다시 가보겠거니 했는
데 또 다시 북쪽 땅끝으로 유배를 갔다 왔으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나
는 추사선생의 글씨 가운데 당시의 심경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대팽
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여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대련이라
고 본다. 즉 ‘두부, 오이, 생강, 야채를 보글보글 끓이고, 부부, 아들딸, 손
자 손녀들과 다함께 둘러앉아 즐겁게 먹는 것’이라는 내용인데, 세상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중국의 오영잠吳榮潛(1604~1686)이 중추가절中秋佳節에 집안 잔치를 하며
읊은 글에서 차용하여 쓴 것인데, 그는 이 대련의 협서脇書에 아래와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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