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5 - 고경 - 2023년 10월호 Vol.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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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의 첫 번째 도량은 콜카타에서 시작했다. 이들 종단은 북을 두드리
며 경전을 외면서 가두행렬을 했는데, 주민으로부터 시끄럽다는 항의가 컸
다. 결국,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콜카타에서의 포교활동은 중
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니치다츠 일행이 이동한 곳이 봄베이[뭄바이]였다.
이곳은 니치다츠를 따르는 일본산 신도가 일본 면화 인도지점장으로 봄베이
사무소에 부임한 곳이었다. 1932년, 니치다츠는 이러한 인연을 기반으로 봄
베이에 첫 번째 도량을 열었다. 3년 후, 다시 콜카타에 도량을 세웠고, 1936
년에는 라즈기르에 도량을 세워 인도인 신도들을 늘려나갔다. 이 일본산의
교세확장은 향후 니치다츠의 전쟁협력의 교두보가 되었다.
간디와의 만남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니
치다츠가 간디를 처음 언급한
것은 『십설법辻說法』에서이다.
『십설법』에서의 간디는 민족
운동 지도자나 인도의 성자가
아닌, 근대문명을 비판한 『힌
두 스와라지』의 저자로서 언급
사진 4. 후지이 니치다츠와 마하트마 간디(1933).
되었다. 니치다츠는 불교발상
지인 인도가 왜 영국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컸다. 이 점
에 대해 그는 간디의 언급을 『십설법』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인도는 석가의 나라이다. 종교국인데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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