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 - 고경 - 2023년 11월호 Vol.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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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숭고해지는 감성적 참회의 역설[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을 결합
한 열반게涅槃偈를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책을 보지 말라.”거나 “내 말 믿
지 말라.”는 등의 평소 언행에서 보듯이 스님의 삶과 말씀이 모두 역설적
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은 흑백논리의 양변兩邊에서 벗어나기에 중도中
道이고, 중도는 불성佛性입니다. 스님께서 중도불성의 자리에서 평생 추구
하신 간화看話의 방식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역설의 딜레마’와
그 논리 구조가 다르지 않기에, 급기야 스님의 모든 언행에서 역설을 시
현示顯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간화의 깊이를 가늠하는 잣대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夢
中일여, 숙면熟眠일여의 세 가지 관문을 제시하셨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
정 중에 항상 화두가 성성해야 하고(동정일여),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 수 있
어야 하며(몽중일여), 꿈도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게 들려야
합니다(숙면일여). 자신이 들고 있는 화두에 얼마나 ‘몰입’했는지에 따라서
정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철스님께서 ‘간화 몰입’
의 기준으로 제시하신 이런 세 가지 관문은 원래 전문 수행자의 정진을 독
려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세속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무언가를 크
게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가 자연스럽게 취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몰입’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대 재료공학과
황농문黃農文(1958~) 교수의 저술과 강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인 최초
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을 수상한 허준이許
埈珥(1983~) 박사의 경우도, ‘몰입’이라는 점에서 그 외삼촌 할아버지인 한
국 최고의 조각가 권진규權鎭圭(1922~1973)를 닮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을
모두 가까이에서 지켜본 허 박사의 아버지 허명회許明會(1955~) 교수의 통
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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