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1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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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그 아래에는 남악회양에서 불감까지 54세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일본의 엔니에게 법을 전한다는 뜻의 글이 적혀 있었다. 법의와
             지팡이도 받았다. 1241년 출발,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엔니유물구족목록圓爾遺物具足目錄』 등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가 중국에

             서 가져온 서적은 선종의 등사, 어록, 시문집은 물론, 경론, 천태장소, 유교
             전적 등 천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엔니는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 불감과도 밀접한 교류를 이어갔다. 귀국한 다음 해

             인 1242년에 경산徑山의 대가람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하카타의 상인 사

             국명謝國明에게 부탁, 건축 재건을 위해 목재 천 본을 보내기도 했다.


                왕실과 권력자의 초청을 받다




               『원형석서』에서는 불감이 헤어질 때, ‘칙사만년숭복선사勑賜萬年崇福禪寺’
             라는 글자를 주면서 “그대가 최초로 머무는 사원에서 이것을 편액으로
             삼으라.”고 했다고 한다. 엔니는 띠집에

             라도 의탁한다면 숭복을 걸겠지만 칙사

             두 자는 어떻게 쓰겠느냐고 반문하자,
             불감은 “너의 도량이라면 반드시 왕공들
             로부터 흠모와 존숭을 받을 것이다. 너

             는 그것을 갖고 가기만 하고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엔니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단에
             [湛慧]가 후쿠오카에 정사를 세우고 엔니

             를 초정, 개당설법을 부탁했다. 그리고                  사진 2.  쇼이치 국사 초상, 동복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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