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1 - 고경 - 2024년 6월호 Vol. 134
P. 191
이므로 세속에 흘러갈 수 있었다. 사구가
아닌 활구 참구를 통해 참된 본성을 회복
하는 길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
다. 이 유계는 난계가 평생 선사로서 어떠
한 길을 걸어왔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증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 5. 난계도륭의 편지(쇼이치국사 엔니벤
앞의 사마젠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난 넨 앞).
계는 “이렇게 회득하면 색색의 전혀 다름도 모두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
고, 능엄·금강의 세계와 선과는 다른 것은 없다. 만약 의심의 마음이 터
지지 않고 체득 성찰하는 것이 아직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선과 교가
다름을 보게 된다. 우리 종은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단지 그 근본을 얻으
면 그 끝을 얻지 못함을 고뇌할 것 없고, 부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함에 고
뇌할 것 없이, 우리 마음을 깨달아 얻으면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마음 하나가 살활자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
여준다.
사후 난계가 지니고 있던 거울을 한 제자가 챙겼는데 꿈에 그 거울에서
관자재보살이 나타났다. 당시의 무사 권력자가 그 소식을 듣고 달라고
요청했다. 거울을 갈아서 보니 “존엄하고 대자대비한 상호가 모두 넉넉
하게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원형석서』) 그만큼 일본 사회에 그가 끼
친 영향력이 컸음을 보여준다. 1278년 난계의 사후에 그를 사모한 호조
토끼무네의 요청으로 무학조원無學祖元이 오게 되었다. 토끼무네는 토끼
요리의 차남으로 막부 8대 집권자였다. 난계의 공덕으로 건장사는 최신
의 중국선을 일본에 전파하는 첨단의 무대이자 중일 문화교류의 전진기
지가 되었다.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