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고경 - 2024년 7월호 Vol.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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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처음 뵙는 성철 큰스님의 눈빛은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안광眼光을
          뿜어내시며 마주 쳐다볼 수 없는 열기가 느껴져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던
          기억입니다. 그다음의 자세한 이야기는 소납의 졸저인 『성철스님 시봉이

          야기』(장경각 발행, 2016)를 참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백련암 오르는 길이 이제는 대구서 해인사까지 중간에
          고속도로가 놓이고 4차선 지방도로와 2차선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어서
          대구 서부정류장에서 해인사까지 한 시간 정도에 도달하는 시대가 되었습

          니다. 해인사 올라가다 국일암 입구로 찻길을 오르면 이제는 그 뒤로 백련

          암까지 중형차들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찻길이 잘 닦여져 있습니다.


            백련암 마당에 텐트치고 아비라기도하던 시절




           소납이 처음 백련암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는 좌선실 50평, 원
          통전 20평, 영자당 6평, 천태전 6평, 서쪽 기도실 15평 5칸짜리 방이 모든
          건물의 숫자였습니다. 행자 생활을 시작한 72년 그해 음력 2월 19일은 성

          철 방장 큰스님의 환갑이 되시는 해였습니다. 소납이 막 30세로 출가를 하

          였으니 큰스님께서는 소납에겐 30년의 대선배가 되시는 셈입니다.
           맏상좌인 천제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가을에 문경 김용사에 계
          시던 성철스님께서 백련암으로 옮겨 주석하시게 되었습니다. 지난봄부터

          내가 먼저 백련암으로 와서 주변 정리를 하였는데, 좌선실 주변만 덩그러

          니 집이 서 있고 그 뜰 아래는 바로 경사가 져서 저 밑 밭떼기까지 훤히 뚫
          려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기 불면석 끝부분을 기준으로 삼고 천태전 앞까
          지 자연석으로 마름모로 돌담을 쌓아 올리는 공사를 마치고 마당을 넓게

          정리하여 큰스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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