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고경 - 2024년 8월호 Vol.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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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조건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무조건적이고 불변
하는 것’으로 둔갑시키는 힘이 언어에 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언어
를 매개로 그렇게 착각한다.
인간은 다수·혼종·관계·변화를 내용으로 하는 특징적 차이들을 명
확히 구분하기 위해 언어로 호명呼名하여 개념으로 정립한다. 그런 후 언
어로 지시한 내용을 ‘단일·동일·독자·불변의 것’으로 간주한다. 차이들
에 대한 비교·판단·평가·분석·추론·이해의 일관성을 확보하여 문제
해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독자·동일·불
변의 현상이나 존재는 없다. 언어인간이 문제 해결력을 고도화시키기 위
해 수립한 ‘요청된 허구’일 뿐이다. 이 가설假設된 동일성·독자성·불변성
관념은 문제 해결력을 높이기도 하지만 치명적 후유증을 수반한다.
‘동일한 것’은 ‘동일하지 않은 것’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동일성
관념의 사유방식이다. 이것은 동일성 관념이 지닌 원천적 폭력성이다. 서
양은 이 동일성 관념을 아예 사유의 논리적 준칙으로 수립하고 있다. <A
는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동일률同一律), <A를 주장하면서도 A가 아닌 것
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모순률矛盾律), <A이기도 하고 A가 아
닌 것이기도 할 수는 없다>(배중률排中律)라는 것이 타당한 사유의 논리적
원칙이라는 것이다. 동일성 관념에 근거한 논리적 사유가 ‘사실’과 충돌하
고 ‘인위적 폭력성’에 노출되는 원천이 여기에 있다. 세계 그 어디에도 순
수한 동일성·독자성은 없다. 모두가 섞여 있고, 서로 기대어 있다. 인간
의 모든 경험은 ‘반대되는 것이나 다른 것과의 대비’에서 발생한다. 선과
불선, 행복과 불행, 안락과 고통, 지혜와 무지 등, 모든 경험은 ‘차이 나는
것들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경험의 발생 조건은 ‘차이들과의 동
거’다. 세계는 차이들에 기대어 ‘다수·혼종·변화·관계의 개별화된 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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