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선림고경총서 - 15 - 운문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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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여러분에게 말하노니,당장에 아무
일 없어진다 해도 벌써 서로를 매몰시키는 것이다.여기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말을 쫓아 이해하려 하면 대단히 잘못되는 것이며
질문과 논란을 던지려 한다면 한바탕 말재주만을 늘릴 뿐,도에서
는 더더욱 멀어지리니 어느 때나 쉴 날이 있으랴.
이 일이 말에 달렸다면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를 설해 놓고
도 어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였겠으며,무엇 때문에 교외별전
을 말하였겠는가.배워서 이해하는 지혜[機智]로 치자면 비나 구름
같이 자재하게 설법하는 10지(十地)보살도 견성(見性)에 있어서는
비단으로 한 겹 가리고 보는 격이라고 꾸지람을 들었다.그러므로
어쨌든 마음에 무엇이라도 있으면 모두가 천지처럼 벌어진다는 것
을 알겠다.
그렇긴 하나 체득한 사람이라면 불을 말해도 입을 태우지 못하
듯,종일토록 무엇을 말해도 입을 뗀 일이나 한 글자도 말한 적이
없으며,종일 옷 입고 밥 먹어도 쌀 한 톨 씹거나 한 오라기 실도
걸친 적이 없다.그렇다 해도 이것은 아직 가깝다 할 정도의 얘기
니,반드시 실지로 체득해야만 하리라.
말[句]속에서 기미[機]를 드러내 보이는 납승 문하의 가풍으로
친다 해도 그것은 부질없이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며,설사 한마디
말끝에 바로 알아차린다 해도 까맣게 잠들어 있는 놈이다.”
그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그 한마디입니까?”
“ 들어보이는 것이다[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