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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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하고 나서니, 상좌인 저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큰스님의 돈오돈수사상에 학문적으로 힘이 되어 주
신 분이 있었으니, 바로 미천彌天 목정배睦楨培 동국대 교수였습니다. 목
교수는 삼천 배를 하지 않고도 언제든 큰스님을 만나실 수 있는 몇몇
분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목 교수가 오랜만에 백련암 마당에 들어서면
큰스님께서는 “철우 아이가!” 하며 무척 반기셨습니다. 불교학계에 ‘돈
점논쟁’이 불붙어 오르기 시작할 때, 목 교수는 여느 불교학자들과 달
리 ‘돈오돈수사상’을 옹호하는 선봉장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선문정로』
출간 직후 바로 큰스님께서 이 책을 저술하신 뜻을 깊이 살피시고, “선
문정로는 대단한 선할禪喝이며, 선의 정신으로 한국불교의 명맥을 이으
려는 원심願心에 고개가 숙어진다. 성철스님은 역대 조사들에게 충실하
려 하면서도 그들을 인용할 때는 매우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보여준
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이 술이부작述而不作하기만 했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틀림없이 성철스님은 불교의 최고 핵심 개념인 깨달음, 무명, 수
행에 대해 정의를 내리면서 극단적이고도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였다.”
라는 말씀으로, 큰스님의 원문 인용 방식을 인정하고 문도들에게 용기
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돈점논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문정로』가 출판
되고 간헐적인 돈점논쟁 학술발표가 있어 오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
인 1990년 보조사상연구원 주최로 송광사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와
1993년 10월 해인사에서 열린 백련불교문화재단 주최 국제학술회의
이후였습니다. 그 후 국내외에 3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돈점논쟁
은 10여 년 동안 불교학계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학계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는 바로 큰스님의 문장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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