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3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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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王陽明)과 퇴옹(退翁)의 심성론·수행론 비교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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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사구교 논쟁’으로 통일한다) 이 바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의였
2)
다. 그러나 이 논의는 사실 왕양명이 37세 때, 중국의 서북 변방이
었던 그의 좌천지 귀주성 용장에서 깨닫는, 오성자족(吾性自足)의 ‘심즉
리’(心卽理)설의 이해와 전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돈오
돈수적 ‘깨달음’[覺·悟]이 먼저 있고나서 그것을 철학사상적으로 이론·
체계화하고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퇴옹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성철은 1935년(24세)경 영가
(永嘉)의 「신심명증도가(信心銘證道歌)」를 읽고 지리산 대원사(大願寺)에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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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후 1940년(29세)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깨닫고 ‘오도송’ 을 읊는다.
「
1) 傳習錄」(원래는 『陽明全集』 「傳習錄」 식으로 표기하여야 하나 편의상 「傳習錄」으로 독립
하여 표기함)下 및 왕양명 「年譜」 56세조에 나오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다.(無善無惡心之體)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지의 움직임이다.(有善有惡意之動)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다.(知善知惡是良知) 선을 행하고 악을 떨치는 것이 격물
이다(爲善去惡是格物)”라는 네 구(句)를 둘러 싼 논쟁을 말한다. 이하 이 논쟁에 대해서는
「傳習錄」下와과 『陽明全集』(이하 『陽明集』) 下, 「年譜」 56세조 및 『王龍溪先生全集』(이하 『龍
溪集』) 권1, 「天泉證道紀」를 참조할 것. 四句敎의 전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최재목, 「東
アジアにおける陽明學の展開」 (筑波大學博士學位論文, 1991. 3.), 28∼32쪽[여기서는 최
재목,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이우진 옮김, (정병규에디션, 2016)에서 <제3장 양명학
분열의 기점과 그 양상-치양지에서 나타나는 두 측면의 구체화-> 부분(117-138쪽)] 참조.
2) 이에 대해서는 최재목,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이우진 역, (정병규에디션, 2016)의 제1
부 제3장 <양명학 분열의 기점과 그 양상-치양지에 나타나는 두 측면의 구체화>(117-129
쪽); 陳瑞新, 「陽明學中的‘頓悟’·‘漸修’之辯-兼論鄒守益對‘四句敎’的回應」, 『社會科學家』,
(桂林市社會科學界聯合會, 2015); 임홍태, 「용계와 서산의 사구교 해석」, 『퇴계학논총』17
권, (부산퇴계학연구원, 2011.6) 등이 있다.
3) 퇴옹의 ‘오도송’은 이렇다;
황하서류곤륜정(黃河西流崑崙頂)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으로 오르니,
일월무광대지침(日月無光大地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린다.
거연일소회수립(遽然一笑回首立)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의구백운중(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