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6 - 퇴옹학보 제1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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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 『퇴옹학보』 제17집




            을 ‘한국불교의 현실’에 어떻게 펼쳤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퇴옹의 불

            교수행의 디시프린과 그 프랙티스는 ‘돈오돈수’라는 개념 속에 다 들어
            있으므로 바로 그것이 ‘프락시스’(praxis. 사고와 병행된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양명과 퇴옹이 약 400년의 거리가 있음에도 철학사상의

            내부에 들어서면, ‘돈오돈수’적 차원에서 이론적 논의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어서, ‘왜 심성론·수행론이냐?’에 대해서이다. 심성론·수행론이란
            간단히 말하면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회·

            정치 혹은 사회·정치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혹은 종교철학에서도

            ‘인간’이란 존재를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두고 묻는 것이 기본이다. 왜
            냐하면 그 시대와 지역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인간)

            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나 행정, 정치와 종교적 교화도 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파악이 있은 다음에 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

            뒤 따르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I. Kant. 1724-1804)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Was kann Ich wissen?)’를 담당하는 인식론, ‘나는 무엇을 해야
            만 하는가?(Was soll Ich tun?)’를 담당하는 ‘윤리학’, ‘나는 무엇을 희망해

            도 좋은가?(Was darf Ich hoffen?)’를 담당하는 ‘종교학’의 물음들이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를 묻는 ‘인간학’으로 귀결한다
            고 본 것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점은 유교든 불교든 기독교든 교학체계

            의 구조상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인간

            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자기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
            문이다. 예컨대 유교에서도 『소학(小學)』이라는 기초적 작업인 필로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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