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고경 - 2015년 1월호 Vol.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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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 낭자한 피는 드디어 우유빛
같은 젖으로 변해버렸다. 그야말로 혈유불이 (血乳不二)의 경
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물론 몸은 보란듯이 본래대로
회복되었다. 이에 놀란 왕은 참회하고 선인의 종교적 제자가
되었다. 왕권과 종권이 충돌했을 때는 신통력을 보여주는 것
이 제일 빠른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준다.
『직지』에도 ‘우유사건’을 기록으로 남겨두다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명한 『직지 (直指)』에는 선종의
서천 24조인 사자(獅子) 존자의 우유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전후 상황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거두절미한 채 사건의
결과만 간단하게 요약해 놓았다. 모르긴 해도 이 역시 입에
담기에 민망한 치사한(?) 이유로 왕권과 종권의 충돌이 있
었을 것이다. 계빈국의 왕이 “이미 오온(五蘊)이 공(空)하다
고 했으니 목을 달라!”고 했다. 그놈의 반야심경은 짧다는
이유로 아무나 외워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는 통에 그
화근이 사자 존자에게 미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존자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든지 그의 입에서는 “목뿐만 아니라 이미
몸도 내 것이 아니다.”라는 도를 넘는 답변이 나왔다. 이에
주저 없이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로 치솟았다(白乳高丈)’고
기록하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쟁터도 아닌데 아
무데서나 칼을 휘두른 왕은 그 과보로 팔이 저절로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王臂自落]고 전한다. 이 사건 역시 주변사람들
에게 적지 않는 종교적 감화력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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