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고경 - 2018년 8월호 Vol.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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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64



                           실상에 들어가는 네 문



                                                   서재영 |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따가운 햇살을 받고 노랗게 살구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

           면 노란 살구가 창문을 두드린다. 보이는 대상이 곧 실재라고 믿는 우리 눈

           에는 먹음직스럽게 익은 살구만 보인다. 하지만 살구가 제 혼자 그렇게 영
           근 것은 아니다. 시인 장석주는 야무지게 익어가는 한 알의 대추를 보며 다
           음과 같이 노래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

           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현상과 본질을 너머



             시인은 개체 존재의 실체 없음과 존재의 관계성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개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존재한다. 한 알

           의 살구는 햇살, 토양, 바람, 구름, 빗물 같이 보이지 않는 관계의 사슬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살구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라면 살구가 있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관계의 사슬은 본질에 해당한다. 화엄은 그 관계의 실상을 밝
           히는 교설이다. 화엄에서는 현상을 사事 또는 용用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

           는 관계성을 이理 또는 체體라고 한다. 우리가 보는 개별적 사물은 현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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