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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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회색고양이(A)’를 인식하지만 그 언어에 의한 인식은 개념적으
           로 상정된 것일 뿐 지금 눈앞에 있는 ‘회색고양이(A)’를 있는 그대로 지칭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지칭하고 있는 언어는 예전에 그 ‘회색고양이(A)’

           와 유사한 ‘회색고양이(A)’를 지칭한 적이 있는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언어도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한 마리의 회색고양이를 지칭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어로 지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회색고양이(A)’는 우
           리에게 인식될 것인가.

             예를 들어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거울이 아

           니라 거울에 비치는 것이다. 거울이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을 비추어 보기 위
           함이지 거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거울이 없다면 어떻게 ‘나’를
           비추어 볼 것인가? 비유하자면 붓다의 언어, 붓다의 모든 가르침도 거울

           이다. 비록 거울이 낡고 오래되었을지라도 그것에 비추어진 ‘나’는 현재의

           ‘나’이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나’이다. 순전히 언어에만 국한해 보아도 마찬
           가지이다. 모든 언어는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고 내 앞
           에 있는 어떤 거울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순간 생겨난 것이 아닌 이상 오

           래된 거울[古鏡]이다. 그 오래된 거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은 거울이 아

           닌 것처럼 인간이 언어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다. 『중
           론』은 그 오래된 거울에 자신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비추어 보라고 말하고
           있다.


                                  배경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일본 류코쿠龍
                                  谷대학에서 불교인식론·논리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전문연구원이다. 주요 논문으로 「쁘라즈냐
                                  까라굽따Prajñākaragupta의 분별kalpanā론」(학위논문)과 「원효의
                                  진리론 논증」, 「쁘라즈냐까라굽따의 언어의미론」, 「디그나가의 언
                                  어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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