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5 - 고경 - 2019년 1월호 Vol.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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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겨우) 문 밖에 버렸다. 그런 후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던졌다. 불상
            이 카작(མཁར་བྲག) 지방의 평원에 도착했을 때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도 들
            지 못해 그 자리의 땅을 파고 묻었다. 바씨氏의 노비들[འབལ་རྗེ་ཁོལ།]에게 관리

            를 맡겼다. 밤에 흙으로 덮어 놓았으나 다음 날 불상의 상반신 부분이 곧

            게 선 모습으로 땅 위로 드러났다.
              중국에서 온 화상和尙 한 명이 – 그는 본래 옹조의 시종으로 토번에 왔
            다가 라모체 사원에 머물렀다 – 마침 당나라로 추방됐는데, 그가 토번과

            당나라의 경계선에 도착했을 때 신발 한 짝을 어제 걷던 길에 두고 왔다.

            화상은 “나의 신발 한 짝을 어제 걸었던 토번 땅에 두고 왔는데, 이는 토번
            땅에 다시 부처님 가르침의 불꽃이 일어날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라싸의 카작 지역에 있던 사찰과 자마잰상 지역에 있던 사찰이 훼손됐다.

                                                                       11)
            자마잰상에 있던 종鐘은 칭부의 바위산에 묻혔는데, 지금 삼예사의 종 이
            이것이다.
              장마장(ཞང་མ་ཞང་། 마장촘빠제)이 불법佛法을 박해할 때 라싸뻬하르 지역은 거
            대한 도살장으로 변했다. 살해한 양羊의 시체를 불상의 손 위에 놓았고, 양

            의 창자를 불상의 목에 휘감았다. 장마장은 모든 백성들에게 “지금 이후로

            사람이 죽으면 ‘체(ཚེ།)’라는 불교 의식을 행하지 못한다. 만약 불법佛法을 믿
            는 사람이 있으면 단신으로 영원히 추방시키겠다.”는 법령을 선포했다. 이
            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박해 받고 훼손됐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장나남

            과 치톡제탕라바는 탕라산 밑에서 “까! 까!”라는 슬픈 소리를 지르며 죽었

            다. 족로제상개공은 혀·손·발 등이 매 마르며 죽었다. 장마장에게 커다






            11)  지금 삼예사 대전의 문에 걸려있는 종은 이 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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