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고경 - 2019년 2월호 Vol. 70
P. 39
‘sabhā’의 음사인데,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 번역합니다. 더
솔직하게는 잡회雜會·잡잡雜雜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은 ‘참고 견뎌야 할
곳’이라는 얘깁니다.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뒤섞인 곳’이기 때문이겠지요.
왜, 이 세상은 ‘참고 견뎌야 할 곳’인가
이 세상은 참고 또 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무자비한 곳이지
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까닭입니다. 굳이 부처님 말씀을 빌릴 것도 없
이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봐도 이 세상은 고해苦海입니다. 업력業力이
부딪치는 곳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업(業, karma)’을 전생―현생―내생의
순환 즉 윤회와 결부시키거나, 행위의 결과로 남되 보이지 않는 어떤 것
으로 추상화 하면서 그 실체를 외면합니다. 흔히들 당장의 고달픈 현실을
한탄할 때 ‘전생에 무슨 업을 지어서…’ 하고 한숨짓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업력의 작용이겠지만, 당장의 생각과 행동을 업이라고 인식하는
데는 투철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업을 짓는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동어반복입니다. ‘업=지음’, 업이 곧 행위 자체인데, 업과 행위를
분리시킴으로써 업을 추상화시키는 것이지요.
업을 일으키는 것은 욕망입니다. 사바가 고해인 까닭입니다. 온갖 욕
망이 충돌하기 때문이겠지요. 가치중립적으로 보자면 욕망은 세상을 굴
리는 힘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욕망이 벌거벗고
세상을 활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사태입니다.
누구도 벌거벗은 욕망을 두 눈 뜨고 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꾀를 냈습니다. 욕망 없이는 살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니 그럴 듯
한 옷을 입히기로 한 것이지요. 그 옷이 바로 ‘행복’입니다. 가히 환상적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