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1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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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롭거나 해로울 수 있고, 다른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곧 인간세상이

            나 천상 세상에서의 즐거운 과보, 악취에서의 고통스러운 과보)은 무기라고 불린다
            고 하였다. “이 세상 및 다른 세상”이라는 말은 전생의 세상과 금생의 세

            상을 말할 수도 있고, 금생의 세상과 내생의 세상을 말할 수도 있다. 눈에
            띄는 의미는 금생의 세상에서 이로운 것이 내생에서 선이 아닐 수 있고,

            금생의 세상에서 해로운 것이 내생에서는 악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삶을 대해는 자세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줄 수도 있는 의미를

            지닌다.
              무루법은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모두 무루선無漏善이다. 유루선有漏善

            이 견도를 증득하지 못한 범부가 행하는 5계, 10선 등의 선善을 말하는 반
            면에, 무루선은 견도 이상의 성자가 행하는 5계, 10선, 6바라밀 등과 증

            득하는 열반을 말하는데, 청정선淸淨禪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유루를 넘어 무루로 가는 일은 후천적 수행만으로 가능할까?

            아니면 선천적 자질이 갖추어져 있어야 할까? 이 물음이 유식불교에서는
            종자론의 맥락에서 논의되었다. 현장은 이 물음에 대한 호월, 난타, 호법

            의 답변을 차례대로 소개하였다.
              첫째 답변은 호월護月의 것인데, 그는 일체 종자에는, 곧 유루종자만이

            아니라 무루종자에도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이지 훈습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훈습력에 의해서는 본유의 종자가 다만 증장할 뿐이

            지 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종자본유설).
              둘째 답변은 난타難陀의 것인데, 그는 모든 종자는 모두 훈습 때문에

            생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훈습되는 것과 훈습하는 것이 모두 아득한 옛적
            부터 있기 때문에, (본유설의 주장과 같이) 아득한 옛적부터 성취된다고 말할

            뿐이고, 종자는 이미 습기의 다른 이름이므로, (본유설의 주장과는 달리)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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