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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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사이 1



                       불[火]국토처럼, 명자꽃 피다



                                                 최재목 | 시인·영남대 철학과 교수





             우리 중간 중간 줄줄 새면서 살아왔지만

             사이 길에 붉은 꽃 되어, 가을 드는 마을에 마주 앉았다
             차마 들킬까 이 마음 숨긴 끝자락 아프도록 문지르며

             이나무 먼나무…, 그런 이름들만 들먹여 봐도
             아득하여라

             햇살로 꽃잎 다독이며 계신, 허접하여 거룩한 하느님
             하마터면 뚝뚝 다 익어서 떨어질까 봐

             대봉감 홍시 딛고, 하나…둘…일곱 발자국 걸어, 가랑잎 흔들리듯
             고요 속을 디디며 부처는 올까

             가장 존귀한 것이라곤
             얼굴 붉히며 타오르는 이 마음 밖에,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니 천상천하 You are 독종…
             그래, 세상 살며 진 빚 어쩌다 중간 중간 가을 햇살로 터져

             짓무르는데
             손 벌려도 더는 없더라, 거기 그저 명자꽃만 궁시렁 궁시렁

             불(火)국토처럼, 피어있더라
             하마터면 참 아름다웠을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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