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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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잘 표현한 골수”라고 했다. 그런데 『화엄경』은

            80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에 속하고, 화엄학 역시 법계연기를 설명하는
            광대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방대한 화엄경과 화엄학이 담고 있는

            광대한 사유의 세계를 어떻게 210자의 짧은 게송 속에 담아 낼 수 있을
            까?

              이에 대해 일연 스님은 “솥의 국 맛을 아는 데는 고기 한 점이면 충분
            하다.” 하고 평했다.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국이 어떤 맛인지 알기 위해

            가마솥의 국을 다 먹어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점의 고기만 먹어봐
            도 그것이 소고기국인지 동태탕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엄사상이

            방대하다고 80화엄을 다 읽고, 수많은 논소를 탐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
            는 것이다. 210자로 압축된 법성게만 잘 이해해도 화엄사상의 정수를 이

            해할 수 있다는 극찬이다.
              의상 스님은 당나라로 건너가 지엄 스님 문하에서 법장 스님과 함께

            화엄학을 공부한 수재였다. 하지만 의상 스님은 법성게가 담긴 일승법계
            도 외에는 어떤 책이나 글도 짓지 않았다. 이는 일승법계도를 통해 자신

            이 공부하고 깨달은 모든 내용을 담아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
            생일대의 공부를 모두 쏟아 넣은 유일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

            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의상 스님은 ‘법계도기’의
            발문에서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려는 까

            닭”이라고 했다.
              화엄은 법계연기를 핵심으로 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조건(緣)을 따라

            성립한다는 ‘수연성隨緣成’을 강조하며 개체적 실체를 부정한다. 의상 스
            님은 법성게를 통해 강조한 존재의 관계성, 개체의 무자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일생일대에 걸친 공부를 집약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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