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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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짓고도 자신의 이름을 뺄 수 있다는 것은 법성게에서 다룬 수연성의
원리가 단지 구호가 아니라 철저하게 체화된 진리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이다.
그런데 법계도를 지은 연도에 대해서는 ‘총장 원년 7월 15일’이라고 정
확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스승 지엄 스님이 입적하기 약 3달 전이다. 자
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연도는 정확히 밝히는 이유에 대해 의상 스
님은 “일체 모든 법은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려는 까닭”이라고
했다. 법성게를 짓게 한 연이란 자신이 유학하는 도량의 화엄학이었을 것
이며, 자신을 지도해 준 스승 지엄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화엄
의 지적 전통 속에서 복합적인 영향을 두루 수용하여 완성된 수연성의 결
과임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풀이된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이 없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에서 화엄종의 중도사상을 두루 섭렵한 후에
맨 마지막 단계에 법성게의 중도사상을 설명한다. 화엄종의 중도사상에
대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성게라고 강조하는 대목이다. 성
철 스님은 법성게의 핵심은 중도사상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화엄사
상의 정수가 곧 중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법성게는 존재의 실상 즉 법성
을 규명하는 것인데, 법성의 실체가 곧 중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성게는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
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
써 알 수 있고,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라고 시작한다. ‘법의 성품은
원융무애하여 두 모습이 없다[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가 법성게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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